네 멋대로 살아라!
인생1./ Naked Life1. 2007/10/30 10:48
5. 얌체친구 ( 난, 나 잘난 맛에 산다! )
1.
누워만 있었던 시절을 기억할 때면 기억되는 두 명의 친구가 있다.
염규종과 전*렬, 두 명 모두 고향 친구이다. 79년 여름을 말하거나, 내 인생을 거론할 때면 염규종과 전*렬, 2명이 가장 고마운 친구로 지명되는 인물이다.
당시 규종이네 집과 우리 집은 경기도 수원시 율전동 336번지의 땅위에서 울타리 까지도 같이 써야했던 이웃집이었는데, 규종이는 농사짓는 집안의 장남답게 어린나이 때부터 농사일을 거들어야했다. 이 부분에서는 장남인 그와 막대인 나는 너무 다르게 자랐다.
내가 누워있던 77~79년 사이, 특히 78년은 유독이 가물었었고, 또 무더운 여름이었다. 그해 그가 직접 지은 참외를 딸 때면 꼭 몇 알씩을 챙겨 오곤 했었다.
비록 상품성이 떨어지지는 몇 알의 참외였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당시의 규종이의 행동에 내심 고마워하고 있다.

당시 내가 다녔던 파장초등(국민)학교는 시골 학교였고, 어찌된 일인지 파장 초등학교 주위의 동네들은 60년, 61년생들이 심지어는 62년생까지도 나이를 구별하기가 힘든 상태였다. 아마도 60년의 4.19 학생운동, 61년 5.16 군사 쿠데타,...등으로 사회적으로 혼란했던 여파가 당시 시골에서 태어난 신생아들의 출생신고에도 영향을 끼쳐서 유독이 60년, 61년도에 태어났던 아이들의 출생신고까지도 뒤죽박죽 된 것 같다.
지금도 고마워하고 있는 규종이의 행동이었지만, 79년 8월 이후에 점차로 살아남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마음 한 구석에 규종이와의 2살 차이에 대한 거리감을 뛰어 넘지는 못했다.
동네의 다른 친구들은 이런 간격을 뛰어 넘어서 60, 61, 62년생들이 한꺼번에 어울리는 측도 있었고 60년 생중의 몇몇 친구들은 그렇지를 못했었는데, 나는 어울리지 않는 몇몇에 속했다. 지금이야 2년을 우습게 여기지만 감수성과 텃새, 나이 값이 판을 치는 20대 초반은 그렇지를 못했었다.
그 이후에도 서너 번 그의 신세를 진 적이 있다.
한번은 결혼했었던 여자를 돕기 위해서 결혼을 앞두고 규종이에게 1500만원을 빌렸던 적이 있었고, 책을 출판하기 위해 사용했었던 카드를 돌리기 위해서 2-3번 돈을 빌린 적이 있다.
아직까지는 규종이한테 “고맙다”는 말을 서너 번이나 참고 있는 셈인데, 내가 죽기 전에 마음속에 남겨 둔 빚을(?) 갚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2.
또 한명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던 전*렬이다.
오늘날의 내가 있기 까지는 내 부모형제와 서정호 목사님과 전*렬를 인정해야만 한다.
79년 8월 교회 부흥회에 참석하기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내 핏줄이 아니고, 당시 서정호 전도사(후에 목사를 받음)와 전*렬의 주도 아래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81년도 1월에 안양에 있는 성결 신학교(지금의 성결대학교)에서는 필기시험 없이 서류전형만으로 신입생들을 모집한 적이 있었다. 그와는 81년 1월에 성결 신학교에 입학원서도 같이 낸 적인 있었다. 79년 이후 99년까지 그와는 몇 번은 트러블이 있었어도 그런대로 친구관계를 유지하면서 지냈었다.
2000년 1월 1일 내가 결혼을 하면서 그의 변덕스런 성격 때문에 울화통을 터트리다가 2001년 5월 이후에는 결별된 적도 있었다. 최영철의 병풍을 내가 권해서 그가 99년 7월에 구입했었는데, 구입조건은 선구 후지불 조건이었다. 그 돈은 우선적으로 내 통장에서 빼서 최영철한테 건네주었는데 99년 7월부터 2001년 5월 까지 근 20개월 동안 400만원 중 100만원 받았었다.
자기 입으론 한달 용돈으로 400만원이나 그 이상을 쓴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놈이 아무리 내가 권해서 산 병풍이라도 병풍 값 400만원 중 100만원만 지불하고 나머지 300만원은 오리무중이었다.
2000년 1월 이후 몸도, 마음도, 돈도 너무 꼬이고 힘들어서 안산의 교회건물을 정리하고 병점으로 올 때에 그에게 나머지 300만원을 요구했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그리고 병풍을 도로 가져가란다.
여기까지는 참을 만 했다. 당시 잔금 받을 날짜는 5월 31일이고, 이사 날짜는 5월 20일로 기억한다. 하여튼 잔금 받을 날짜와 이사 하는 날짜사이에 10일 정도의 차이가 있어서, 전*렬에게 그 사정을 이야기 하고 5층까지 나무 병풍을 옮기려면 이사할 때 가져가야 하니깐 돈 100만원은 2주 뒤에 주겠다고 하니깐 “돈 100만원 가져와서 병풍 가져 가라”고 딱 잡아떼었다.
그러면서 “상명아 너도 사회생활을 해 봐서 알 테지만 거래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피차에 딴 소리가 안나오게 돈하고 물건하고 맞바꾸게 당장 돈 100만원 가져와서 병풍 가져가라”는 것이 그의 매몰찬 전화기를 통해 건너오는 답변이었다.
단 돈 100만원의 거래! 무슨 거래! 20개월 동안 잔돈을 주지 않다가 병풍을 다시 가져가라는 조치는 제대로 된 거래인가? 그게 40년 동안 한 동네에서 산 친구놈 한테 할 소린가! 또 그 당시는 내가 너무 힘들었을 때였다. 내가 가장 힘들어하던 시기임을 밝혔어도 몰인정하고 매몰찬 그의 태도에는 더 이상 할말을 잃어야했다.

한 달에 용돈으로 400만원이상을 쓴다고 자기 입으로 떠벌리고 다니는 놈이 기껏 단돈으로 100만원에 “...거래”운운하는 데에는 진짜 상종하기 싫을 정도로 그가 싫어졌다. 내가 권했다는 이유로 20개월 만에 물건을 퇴짜 놓는 병풍을 2~3일 뒤에 100만원을 마련해 가지고 가서 병풍을 도로 가져왔다. 2004년 여름에는 이 병풍 때문에 더 황당한 일이 벌어졌지만 최영철이 만든 나무 병풍으로 인해 그와 얽힌 이야기는 여기서 멈춘다.
지금도 79년 여름을 말하거나, 내 인생을 거론할 때면 한번은 가장 고마운 친구로, 한번은 가장 별 볼일 없는 놈으로 지명하는 인물이 전*렬이다.
황당한 몸을 가지고 혼자서 힘들게 출판사를 설립하고, 책을 만들고, 책을 출판하고, 2003년 12월15일 조촐한 출판 기념회를 하기 위해서 극히 적은수의 주변사람들과 초등학교 때의 같은 반 학우들만을 초대했지만, 극히 적은수의 주변사람들 중에서도 반 정도는 오지를 않았다. 전*렬은 초등학교의 반 친구이기도 했는데, 그도 오지 않은 주변인물에 낀다.
뒤에 들리는 말로는 내가 자기네들의 행사에는 얼굴도 내밀지 않다가 필요한 한 순간에만 “....내 실속만을 챙기기 위해서 자기들을 오라고 하는 ‘얌체’...”라고 했다고 한다.
후에 이런 말을 전*렬을 통해서 듣다 보니 이번에는 내 입에서 ‘미친놈들’이라는 말이 튀어 나왔다.

초등학교 친구들한테 들어야만 했던 ‘얌체’라는 말에 대해서 한마디 하고 싶다.
그들의 입에서 나온 ‘얌체’라는 말은 200년 1월1일 내결혼식에 와 주었던 일과 2001년 1월에 돌아가신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에 조문 와 주었던 일을 근거로 한 말들인데, 아버님 이 돌아가셨을 때 조문 와 준 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고마워하고 있다.
내 몸 사정상, 그리고 내 형편상 초상집에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다니지를 않았었다,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하루의 볼 일을 햇볕을 피하기 위해 아침 6시-9시 사이에 해야만 하는 몸을 가지고 남의 대소사에 찾아가서 인사치례를 한다는 일자체가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햇볕이 강한 하반기에는 9시 보다도 더 이른 시간에 일을 끝내야만 한다. 또 내가 찾아 갈 생각을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사회의 관습상 오전 9시-10시 사이에 집안의 대소사, 특히 초상집문상을 해야 하는 집은 거의 없다.
그러나 결혼식장에는 어느 정도 얼굴을 내밀었었다. 우리나라에서 남자들의 결혼 적령기인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정도이다. 200년1월1일에 결혼한 나와는 10년 정도의 차이가 있다. 초등학교친구들 역시 대부분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정도에 결혼식을 했었고, 그 중에 몇 친구의 결혼식에 얼굴을 내밀었기 때문에 내 결혼식에 와 준 것에 대해서는 크게 고마워 할 입장도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초등학교 친구들한테 들어야만 들어야 했었던 ‘얌체’라는 말은 아버님이 소천 한 때에 와 준 것만을 가지고 내가 필요할 때 만 자기들한테 연락하는 ‘얌체’였다는 말이 된다,


3.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진짜 할 말이 많다.
초등학교를 같이 졸업한 녀석들로부터 ‘얌체’라는 말이나 들어야 했던 내 인간성을 논하기 이전에 햇볕, 열, 더위, 습도, 불빛,... 인간의 삶을 유지 지켜주는 이런 요인들에 적응하지 못하는 몸을 가지고 25년째를 살고 있는 중이다.(25년은 초고를 썼던 2002년 기준. 지금은 30년) 살고 있는 중이다. 이 부분에서 내가 살기위해서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초등학교 때의 반 친구들이나 주변 인물들, 내 가족이나 친척들 모두가 내 몸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점과, 앞에서도 수 없이 언급했던 미친놈‘이라는 수식어 정도에서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지를 않고 있다는 점이다.
2003년 12월15일의 출판 기념회 때도 나의 이런 형편을 스스로가 잘 아는 터라 초대하는 인원수를 극히 제한했었는데, 그 적은 인원까지도 초등학교 때의 반 친구들과 같은 생각들을 했었던 모양이다.
아버님이 7형제의 막내였기에 ’4촌‘이라고 불리는 친척들도 많다. 지난 5년 동안 목사로서 힘겹게 버텨오는 기간 중에 단 한명의 4촌조차도 얼굴 한 번 내밀지를 않았다. 4촌들 중에는 기독교인들도 있고 비 기독교인들도 있지만, 그 많은 4촌들 모두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인사치레로 한번쯤 들려주는 절차조차도 생략해 버렸다. 심지어는 친조카사위 녀석도 결혼한 지 4년이 지나 5년이 되어 가는데도 처삼촌, 아니면 처 작은아버지인 나에게 한번 들려서 인사하는 절차조차도 생략한 채로 살고 있으니,...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욕을 얻어먹을 정도로 살지도 않았다. 내가 살면서 ‘이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까운 사람들일수록 나에게 품는 감정이란 게 고작 “...제 까짓게” “...제 주제에” 라고 무시하지 않으면 질투, 시기, 대립,...이런 종류의 감정 인 것 같다.

내가 몸담고 있는 목사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내 몸을 가지고서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내 나름대로 목회를 하는 것에 대해서 격려는 못해 줄망정 몇몇 목사들은 (극히 적은 수의 목사들만 알고 지낼 뿐이지만) 온갖 어려움 가운데서도 내가 교회를 계속한다고 해도 묘하게 비웃는 표정이나 짓고, 책을 쓴다고 해도 비웃거나 고개를 흔들고. 그 책들을 알리기 위해서 내 나름대로 인터넷작업을 한다고 해도 비웃고, 내 개인 홈페이지를 활용 해 목사로서 살아남겠다고 해도 비웃고,...심지어는 내 앞에서 “그런 식으로(?) 목회하려면 목사를 그만두라.”는 말까지도 내뱉는 후배목사도 있을 정도다. 속이 비틀린 족속은 내가 아니고 오히려 ‘내 이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지금도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는 중이지만 햇볕, 열, 더위, 습도, 불빛,...에 내 몸 조건에 맞추기 위해서 4월부터 10월까지 6개월 동안은 낮 시간동안의 외출은 거의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여름 4개월 동안에는 산책과 집안일도 햇볕이 강하기기전인 아침 6시-9시 사이에 해야만 한다. 오전 9시 이전에 하루의 볼 일을 다 해야 한다. 1년에 6개월 이상은 은행일도 대부분 이 시간정도에서 해야만 하는 게 나의 일상적인 생활 방식이다.
이런 부분들이 내가 부딪치고 있는 사회생활이고 인간관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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