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씨가 된다.(1)
인생1./ Naked Life1. 2007/08/28 10:33
2. 말이 씨가 된다.(1)
1
99년 10월 목사 안수를 받을 무렵부터 예언이나 묵시처럼 ‘3년 동안은 힘들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개척 교회를 시작했지만, 지난 5년 동안은 내가 각오했던 것 보다 ‘더 힘들고, 더 지독하게, 더 끔찍하게 모든 것이 꼬였다. 어디서부터 엉켜버린 매듭을 풀어야 할지 몰라서 쩔쩔맬 때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부터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했다.
이 계기로‘말의 힘’ 아니면 ‘말의 능력’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내 인생이나 내 신앙에는 이런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은 수원시 (장안구) 율전동 336번지였다. 내가 다닌 성균관대학교 자연과학 캠퍼스는 집에서부터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었다. 조경학과 사무실까지 가더라도 15분 남짓밖에 안 걸렸다. 그야말로 ‘누우면 코 닿는 거리’의 학교를 너무 쉽게 다녔다. 또 이런 조건 때문에 그나마 졸업장까지 받을 수 있었다.
72년 아니면 73년도에 성균관대가 천천동, 지금의 자연과학캠퍼스 자리로 이주해 온다고 학교 관계자들이 동네 노인 분들을 모시고 ‘터 잡기 행사’(‘고사’라는 표현이 더 옳은 것 같다. 한국인 특유의 정서로 새로 건물을 지을 때는 그 터의 주인인 ‘터주’에게 돼지머리와 돈, 그리고 막걸리까지 부어 바치면서 절하는 행사. 기독교인들은 ‘**예배’라는 이름으로 바꿨지만 그 근원은 별반 다르지 않다.) 이 의식을 치룬 적이 있었다.
그날 행사에 참석하고 오신 아버님께서 술을 드시기만 하시면 “얘, 대학은 걱정 말아라. 내가 보내 줄 테니, 넌 공부만 잘하고 있다가 이 앞으로 성대가 내려오거든 거기 가면 된다.”는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의 이런 말씀에 대해서는 나도, 형제들도 별로 믿지도 않았지만 이의를 달지도 않았었다. 헌데 1.2년이 지나면서부터는 영 틀린 소리로 변하기 시작했다.
72년인가 73년인가부터 이 말씀을 시작하셨는데, 그때까지는 공부 잘하는 우등생이고, 얌전함 모범생이어서 이 말이 어느 정도는 타당성을 가질 수 있었다.
중학교 들어가고 1학년 늦봄부터 ‘얌전한 문제아’가 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형제들이나, 나도, 내가 성대에 입학 할 것 이라는 희망을 갖질 못했다. 다만 내 실력을 모르는 아버님 혼자만이 이 말을 고집하고 계셨다.
그러다가 1977년 11월 초 끔찍하고도 지독스런 RH787쥐약을 먹고 난후 2년 동안은 철저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죽어만 갔으니, 아버지의 이 말은 허무하게 끝난 셈이다.


2
다른 집 자식들은 교복입고 학교에 다닐 때에도 당신 앞에서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상태로 누워 만 있는 아버지의 막내자식을 바라보시면서 자식의 앞날에 대해서 꿈을 가졌다는 사실이 ‘너무 허무하고, 쓸데없는 짓거리’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적어도 78년 여름에 나를 본 사람들 중에는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희망을 단 1%도 갖지 못했다.
178㎝키에 혹 180cm 30몇 kg의 몸무게, 퉁퉁 부어 오른 얼굴, 더위에 지쳐서 헐떡이는 숨소리, 방안에서 해결하는 똥·오줌조차도 머리맡에 놓아 둔 조카의 변기에다가 힘들게 처리해야 했던 것이 78년 여름 ? (79년 여름까지는 비슷한 형편이었다) ? 의 죽어가던 내 모습이었다.
나의 이런 상태를 보고도 내가 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누워서 죽어만 가던 나에게 “얘, 너는 곧 죽어! 이미 살기는 글렇어,...라는 말까지 해 대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말’이라는 게, 아니면 ‘내 운명’이, 그것도 아니면 ‘생명력’이라는 게 참 희한 하고도 끈질겼다. 거두절미하고, 난 기어이 아버님이 습관처럼 말씀하신 대로 성균관대학교, 그것도 집안에 있는 자연과학 캠퍼스에 입학했다.
걷는 것도 뒤뚱거리고, 층계도 제대로 오르내리지 못하고, 앉아 있는 것도 힘든 80년 봄에는 학원 등록 70일 정도에 대입 검정고시 시험에 합격하고, 81년에는 지독히 아프고 힘든 몸에 -그것도 숨쉬기도 힘들어하는 8월 초순에 시작해서 11월 20일경까지- 약 110일 정도를 혼자서 사립 독서실에서 낮에만 공부하고, 학력고사를 보는 날조차도 시험 중간에 1번은 누워있어야만 했을 정도로 힘들게 치루고, 또 그 몸을 가지고 혼자서 명륜동을 몇 번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더니 부모·형제에게 ‘성균관대학교 조경과’의 합격증과 입학등록금 안내문을 내밀었으니, 참 황당하고도 어처구니없는 자식 놈 이었다.
그때 내 몸무게라야 53∼54㎏밖에는 안됐다.

3
처음부터 ‘성균관대학교 조경과’를 갈려고 작정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동국대학교 철학과’를 가려고 했었다. 물론 부모님이야 철학과도, 조경과도 모르시던 시골 분들이셨다.
다만 작은형이 “철학과를 나와서 어디다 써 먹을래!”라는 말을 뒤로 하고 입학원서를 사기 위해서 친구 전**불러서 동국대를 난생 처음으로 갔었다.
갈 때는 전철로 서울 역까지 간 뒤에 택시를 타고 학교까지 갔지만 올 때는 버스를 이용해서 서울 역으로 온 뒤에 전철로 갈아타고 집으로 왔다. 그게 ‘동국대 철학과’ 와의 인연의 전부이다. 입학원서를 사가지고 오면서 1주일에 한번 가는 학교라면 몰라도 1주일에 4-5일 가야한다면 ,..내 몸 상태를 고려해보니 내가 서울로 학교를 다닌다는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동국대 철학과’ 입학원서를 사 온 1월 달은 내 몸 조건이 가장 좋은 겨울철인데도 단 1번의 서울 행차로 가고 싶던 학교였던 ‘동국대 철학과’ 입학은 깨끗이 포기해야만 했다, 그리고 내 집에서,더 정확히는 내 방에서 가장 가까운 성균관대학교 자연과학캠퍼스의 입학원서를 2번째로 샀다.
앞부분에 있는 ‘느낌이 있는 삶’의 46,47번에서 썼듯이 82년 당시에는 ‘조경학’은 별로 알려지지 않는 신설학과였고(82년 당시‘조경학’은 전국에 5개 대학교에만 있었음), 나 역시 조경과에 대한 예비지식도 없이 내 몸과 내 점수를 가지고서 갈 수 있는 대학들과 학과를 골라보니 입학소개 책자에서 내 취약 과목인 수학은 1학년 때까지만 배운다는 ‘성균관대 조경과’ 이상의 조건을 갖춘 곳도 없었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82년 1월에 내가 처한 상황이란 것이 앞뒤 따질 조건도 못 되는 상황이었다. 무턱대고 내 몸 조건에 맞춰서 선택한 조경학과였지만, 의외로 내 성격과 맞는 부분이 많았다.
또 그때 억지로 ‘동국대 철학과’에 입학했더라면 아마도 1학기 중간에 도중하차해야만 했을 것이다. ‘동국대’ 가 아니고 수원에 있는 다른 대학교에 입학을 했더라도 졸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집 앞에 있는 학교니까 5, 6, 9월중에도 학교까지 갈 수 있었고, 성대 자연과학 캠퍼스만의 독특한 건물배치나 설계덕분에 학교 가서도 힘들면 아무 때나 눕거나 시원한 건물 입구에서 멀거니 앉아서 쉴 수 있었던 덕에 그나마 졸업을 했다고 생각한다.
86년 2월 대학을 졸업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조경과’와 연관 된 삶을 살아 본 적은 없다. 지금은 82년 입학 때와는 23년이라는 시간적인 격차가 있지만, 82년 1월 내 몸으로 4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학교로 ‘성대 조경학’과를 선택한 것에 대해서 후회는 없다.


Trackback Address :: http://www.mryoum.com/blog/trackback/212

